한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합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라니요. 회사에서는 감사하게도 2주간의 리프레시 휴가를 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보낼까 고민했습니다. 그냥 아무 계획 없이 쉬는 것만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은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기에, 인생 2막에 대한 생각도 정리하면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아내가 흔쾌히 방콕 여행을 제안해 줍니다. 사실 저희 가족은 방콕 여행을 좋아해서 벌써 3번 이상 다녀온 곳입니다. 하지만 방콕에 홀로 여행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여행입니다. 혼자서 해외 출장을 다녀온 것도 여러 번이지만, 이것은 정말 다른 여행입니다. 저만의 여행입니다.
드디어, 출발
오랫동안 쌓여있기만 하고 쓸 데를 찾지 못했던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비즈니스로 방콕 왕복 항공권을 예약했습니다. 항공권을 예약하고도 수개월을 기다렸습니다. 진짜 가는 걸까? 가면 뭘 할까? 막연한 기대와 함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출발일이 되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비치지 않으려 약간 오버해서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보슬비가 옵니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후 도착한 방콕은 밤 12시가 넘었음에도 33도가 넘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유와 무질서가 조화를 이루는 도시, 방콕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바라본 방콕의 모습은 여전했습니다. 왠지 모를 편안함을 주는 이 도시를 저는 너무나 사랑합니다. 홀로 온 여행이지만, 외로움보다는 편안함이 다가오는 도시는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단지 치안이 좋고, 사람들이 친절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방콕은 모습은 혼돈과 복잡함 그 자체입니다. 35도가 넘는 뜨거운 태양 아래 도로는 수많은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꽉 채우고 있고, 좁디좁은 인도에는 노점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는 전 세계에서 온 다국적 다인종의 관광객들이 도로와 인도를 넘나들며 걸어 다닙니다. 빗물 때가 잔뜩 낀 오래된 낡은 건물들 사이에 수많은 화려한 호텔과 고층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걷다 보면 갑자기 초록함과 감성이 가득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나오기도 합니다.
밤이 되면 방콕은 또 한 번 모습을 바꿉니다. 침침했던 건물 외관들은 화려한 네온사인들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밤거리를 나섭니다. 짜오프라야강에는 화려한 불빛의 유람선들이 떠다니고, 야시장은 시끌벅적 해집니다. 거리의 작은 바들은 흥겨운 음악을 거리에 뿌리고, 호객을 하는 마사지 업소의 종업원들의 목소리도 활기찹니다.
저에게 있어 방콕의 랜드마크는 전봇대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전깃줄입니다. 방콕이란 도시를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하기에 이 보다 적합한 것이 있을까요? 정말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구분하기도 힘들 만큼 복잡하게 꼬여있는 전선들은 조화롭게 자신의 길에 따라 이 복잡한 도시 구석구석에 전기를 공급합니다. 마치 셀 수 없이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찬 방콕이란 도시가 결국엔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한계를 두지 않고 자유를 주지만, 서로가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조화를 이루는 도시입니다. 바로 제가 방콕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힐링의 시간
이번 홀로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힐링이었습니다. 20년이 넘는 직장생활에 찌든 나의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고, 그냥 쉬는 것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그 누구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고, 내가 조금이라도 신경 써야 할 일도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껏 땀 흘리며 운동을 하기도 했고, 하루는 온종일 호텔방의 컴퓨터에 앉아 영화를 보기도 했습니다. 정말 맘대로 보낸 시간들이었지만, 멋진 이 도시는 나의 인생에 기억에 남을 몇 컷을 또 남겼습니다.
▶ 방콕은 역시 1일 1마사지 입니다. 단지 1~2만 원 정도에 온몸에 힐링을 얻을 수 있는 곳들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머리와 어깨에 집중해서 받았습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컴퓨터 작업으로 뭉친 어깨 근육이 어찌나 아프던지요.
▶ 방콕은 짜오프라야강의 뷰도 훌륭하지만, 역시 최고는 시티뷰입니다. 다양한 모양과 서로 다른 높낮이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 시티뷰는 뉴욕 못지않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운이 좋게도 룸이 업그레이드되어 시티뷰가 좋은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시티뷰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 방콕 시티뷰는 밤이 되면 더욱 화려해집니다. 호텔의 루프탑 바에서 멋진 시티뷰 야경을 바라보며 마신 시원한 칵테일은 어찌나 맛이 좋던지요. 비록 혼자였지만, 언제 이런 야경을 보며 멍 때릴 수 있을까요?
▶ 어느 날은 호텔 앞의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에 작은 바에서 흘러나오는 락밴드의 음악에 저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편의점 비닐봉지를 든 반바지 차림으로 들어간 저를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귀청이 터질듯한 락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1시간 넘게 눈앞에서 즐기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비용은 겨우 5000원짜리 맥주 한 잔 값이었습니다.
▶ 코로나 기간 동안 못했던 수영을 오랜만에 했습니다. 뻐근해진 어깨에 어색했지만 기분만은 최고였습니다. 아침 일찍 조용한 인피니티 풀에서 혼자서 맘껏 즐긴 시간이었습니다.
▶ 한국으로 귀국을 하루 앞두고서야 호텔 근처에 대형 식료품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커다란 망고 4개를 사 와서 힘들게 티스푼으로 먹었는데, 배가 터질 정도로 망고를 먹은 건 처음입니다. 따져보니 겨우 개당 600원 정도 더군요.
인생 2막, 은퇴 후 한달살기의 꿈
방콕에 있는 동안 친구와 잠깐 카톡을 했습니다. 친구에게 호텔에서 컴퓨터를 켜 놓고 있는 내 사진을 보냈더니 친구가 "은퇴 이후의 생활을 미리 연습하고 있는 것 같네"라는 답을 보내왔습니다. 답을 읽는 순간 가슴에 왠지 모를 울림이 왔습니다. 그래, 은퇴 후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요즘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젊은 사람들의 해외 한달살기가 유행인 듯합니다. 그러나 사실 해외 한달살기는 시간과 비용에 쫓기는 젊은이들 보다는 은퇴자에게 더 적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은퇴 이민이 아니라 시간과 비용에 쫓기지 않는 롱 스테이 해외여행입니다. 은퇴 이후 무료한 일상에 새로운 경험과 도전의 계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저는 보다 명확한 은퇴 이후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바로 은퇴 후 해외 한달살기 여행입니다. 너무 빡빡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도시의 매력에 푹 빠지는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비록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분명 이 여행을 통해 저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쉼과 미래에 대한 꿈을 얻은 거면 정말 완벽한 여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 후반에 홀로 해외여행, 강력히 권합니다
이 글을 읽는 40대 후반의 직장인 분들께도 꼭 이런 여행을 한 번쯤 다녀오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떠나도 좋습니다. 분명 인생의 기억에 남을 컷과 가슴 한구석에 무엇이든 새로운 희망이란 것을 담아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두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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